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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문학 2005년 12월호) - 이 땅에서 어린이도서관을 한다는 것은

해피리딩 2009. 8. 10. 01:12

 

(어린이문학 2005년 12월호 기고원고)

 

 

이 땅에서 어린이도서관을 한다는 것은

 

한상수(푸른꿈 도서관장)

 

처음 만난 사람과 인사를 할 때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다고 하면 대부분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남자가 웬 어린이도서관!??하고 생각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어린이도서관을 시작한 지 5년째 접어든다. 아이가 어렸을 때 그림책을 읽어주면서 좋은 어린이 책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어린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다양한 어린이책들을 보는 일은 참으로 설레고 즐거운 일이었다. 이렇게 좋은 책을 내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에게도 만나게 해주고싶다는 소박한 바램으로 시작한 일이다.

초등학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녔는데 학교 도서관은 물론 없었고, 지역 자체에 도서관이 하나도 없었다.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좀더 많은 책들을 접하지 못했던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아마 학교나 지역에 제대로 운영되는 도서관이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어린 시절이 훨씬 더 풍족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싶다. 이러한 아쉬움도 어린이도서관 운동에 나서게 만든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원하는 도서관과 현실

아이들은 어떤 도서관을 바라고 있을까? 군포 지역에서 아이들이 ??우리가 바라는 도서관??이란 제목으로 글쓰기를 했는데 이런 내용들이 많았다고 한다.

??보고싶은 책과 좋은 책이 많은 도서관, 가까이 있어 쉽게 갈 수 있는 도서관, 책에 관해 물어볼 수 있는 선생님이 있는 도서관, 재미있는 행사를 자주 하는 도서관, 책을 많이 빌려주는 도서관, 예쁜 도서관??

아이들이 바라는 도서관과 어린이도서관 운영자가 바라는 도서관이 크게 차이가 없는 것 같아 다행스러웠다. 한편으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어린이도서관의 모습을 아이들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 같아 놀랍기도 했다. 정말 이 정도의 소박한 바램을 채워주는 어린이도서관이 동네마다 생기고 잘 운영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이러한 아이들의 요구에 최대한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민간의 어린이도서관에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에 고민이 있다. 좋은 책을 충분히 구비할만한 여건도 못되고, 도서관 환경을 아름답게 꾸미기도 만만치 않다.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부담되는 일이고, 어린이책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서 아이들을 좋아하고 어린이도서관에 열정이 있는 전문사서를 고용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정말 어린이도서관 일을 하는 사람들만큼 좋은 어린이책에 대한 갈증이 심한 사람이 어디 있을까? 어린이도서관에서는 우리 아이들이 읽었으면 하는 책들을 한 권 한 권 꼼꼼하게 읽어보고 구입한다. 내 아이에게 읽힌다고 생각하고 정성껏 고른 책들은 아이들이 세상과 만나는 통로가 되기도 하고 좋은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한 방송 프로그램에 정해진 시간안에 책꽂이에 있는 책들을 뽑아 반대편에 있는 책꽂이로 옮기면 그 책들을 모두 주는 코너가 있다. 이 코너를 보면서 어린이도서관 운영자들을 서점에 풀어놓고 원하는 책들을 마음껏 골라가라고 하는 프로그램은 없나 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정책적인 지원 절실

어린이도서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아주 뜨겁다. 새삼스레 방송의 위력에 대해 실감하게 한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잘 활용한다면 지금까지 사회적 가치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홀대받고 있던 어린이도서관이 제 자리를 찾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지만 이러한 어린이도서관 붐이 마냥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주체의 역량이 충분히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갑자기 맞은 호황이 자칫 거품으로 끝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지금은 다양한 형태로 새롭게 생겨날 어린이도서관들이 원래의 취지대로 잘 운영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제도를 정비해야 할 때이다. 어린이도서관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 도서관이기 때문에 결코 만만하게 생각하고 접근해서는 안되는 고도의 전문영역이다.

어린이도서관이 잘 운영되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진정으로 어린이도서관을 사랑하고 어린이와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서관을 운영했으면 좋겠다. 채소들도 사람의 발소리를 들으면서 큰다고 한다. 농부의 애정을 많이 받은 채소가 잘 크듯이 애정을 가진 전문가가 운영하는 어린이도서관은 희망을 가질 수 있으리라.

올해 서울과 용인, 대전에 있는 어린이도서관에서 ??어린이도서관 학교??를 열었다. 이렇게 어린이도서관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일꾼들에게 어린이도서관에 대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고 운영 노하우들을 전수하고 함께 토론하는 프로그램이 각 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마련되어야 한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열정을 가진 우수한 일꾼들을 많이 길러내야 한다.

공공도서관에서는 순환근무제를 탄력적으로 운영해서 어린이열람실만 전담해서 근무하는 전문사서제도를 하루속히 시행해야 한다. 학교도서관에도 계약직이 아닌 정규직 사서 교사 제도를 의무화하고, 사립도서관에서도 전문사서를 둘 수 있도록 지방자치단체에서 인건비를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소규모 어린이도서관은 우리 사회의 부족한 도서관 인프라를 보완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운영비 일부를 관에서 지원하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지원이 일시적인 지원에 그치지 않기 위해서는 국회에서 사립도서관 지원법률을 제정하고, 자치단체에서는 지원 조례를 만들어 예산속에 반영되도록 제도화해야 할 것이다. 민간에서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는 이들에게는 조금만 힘을 실어주어도 큰 힘이 될 수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행복하다

한 방송국의 오락 프로그램을 녹화하면서 겪은 일이다. 고양시는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어린이도서관이 많고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편이다. 이러한 고양시의 어린이도서관 현황에 대해 얘기해주고 모두들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있다고 하니 작가가 화를 낸다. 그렇게 잘되고 있는 얘기 말고 어려운 점을 말해 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편집에서 다 잘린다고 하면서. 민간의 어린이도서관은 무조건 어려워야 하고 그런 점을 부각해서 방송에 내보내야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는 얘기이다. 실제로 방송 내용도 어린이도서관 운영자나 이용자들의 자부심이 담긴 얘기는 다 빠지고 극히 일부분 언급되었던 아쉬운 부분만 중점적으로 나왔다.

프로그램 기획자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고 해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가 정말 그렇게 불쌍한 존재인가 하는 자괴심까지 들었다. 물론 한국에서 어린이도서관을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은 길인 것만은 분명하다. 적어도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린이도서관을 하면서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훨씬 많다. 좋아서 하는 일이고, 어린이와 책을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우리는 아주 행복하다.

우리 아이는 아빠가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고 있는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한다. 가정환경조사에 아빠의 직업을 쓰면서 기분 좋아했고, 아빠가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평소의 생각을 말해주어 나를 기쁘게 했다. 아이가 자랑스러워하는 일을 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하다. 할아버지가 되어서도 어린이도서관을 지키고 손주뻘 되는 아이들에게 그림책을 읽어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저자 소개

 

한상수(동녘어린이도서관 초대 관장, 현재 어린이도서관 푸른꿈 도서관장. 책 읽는 시간을 가장 행복하게 여기며 좋은 아빠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