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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사람과책 2005년 5월호] - 인생의 기초체력은 어린 시절 책 읽기

해피리딩 2009. 8. 10. 01:23

 

인생의 기초체력은 어린 시절 책 읽기

한상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 중의 하나는 어렸을 때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자란 곳은 문화적인 혜택이 별로 없었던 지역이었다. 어린 시절 책을 참 좋아했음에도 교과서 외에 읽을 책이 별로 없었다. 가정 형편이 여유가 없는 편이라서 교과서 외에 독서를 위한 책을 별도로 구입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가끔씩 친구 집이나 친척 집에 놀러가서 위인전이나 세계 명작동화를 참 재미있게 보곤 했다. 그때 가장 부러운 친구 녀석은 집에서 문방구를 운영하던 친구였다. 때로는 시내에 있는 서점에 가서 주인의 눈치를 보며 책을 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볼 책이 없을 때에는 동네 형이 준 사회과부도 책을 보면서 미지의 세계에 대한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사회과부도를 보면서 흥미진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책 읽기를 참 좋아했던 시골아이가 책에 대한 갈증을 풀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초등학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시골에서 다녔는데 학교 도서관은 물론 없었고, 지역 자체에 도서관이 하나도 없었다. 아마도 도서관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봐야 맞을 것 같다.

 

최근에 읽은 『기적의 도서관 학습법』(화니북스, 이현 지음)에 인상적인 내용이 있다. 저자가 어렸을 때 아버지를 퇴근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집에 와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 시간이 너무 길고 지루했는데 우연히 학교 근처에 도서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도서관을 다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도서관에서 『동아대백과사전』을 발견하고 신기해하며 읽었는데 이것이 자신의 운명을 바꿔 놓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너무 부럽고도 안타까웠다. 사회과부도밖에 볼 수 없었던 아이와 백과사전을 볼 수 있었던 아이의 차이는 바로 도서관이 만든 것이다.

 

어린 시절 좀더 많은 책들을 접하지 못했던 것이 참 아쉽기만 하다. 아마 학교나 지역에 제대로 운영되는 도서관이 하나라도 있었더라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충만했던 내 어린 시절은 훨씬 더 풍족하고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이러한 아쉬움이 독서 운동에 나서게 만든 하나의 동인(動因)이 되었으리라 생각한다.

어렸을 때 많은 책을 읽지 못한 것이 한(恨)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이에게는 의식적으로 책을 많이 읽어주었다. 아이랑 함께 책을 읽다 보니 우리들 어린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고 수준이 높은 어린이 책들이 참 많이 나와 있었다. 이렇게 좋은 책들을 내 아이 뿐만 아니라 동네의 다른 아이들에게도 볼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지고 어린이도서관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안타까운 경험을 통해서 느낀 것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마음껏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어른들이 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누군가 언제가 가장 행복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때 내가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물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을 때, 특히 뒤늦게 본 딸 아이의 미소와 재롱을 보며 느끼는 행복과 감사가 첫 손가락이다. 그러면서 문득 좋은 책을 읽었을 때 참 행복함을 느꼈던 기억이 났다. 좋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동과 행복은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리라. 마치 미식가가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한 행복을 좀더 많은 사람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특히 좋은 책을 마음껏 읽으면서 상상력에 날개를 달고, 문학적 감수성을 풍부히 하고, 세상에 대한 이해를 넓히면서 제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형성해야 할 어린 시절에 이를 충분히 누리지 못하는 우리 아이들의 처지를 생각하면 안타까움은 더한다.

 

도서관에 올 시간조차 내기 힘든 요즘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공교육에서 제도적으로 책 읽는 시간을 마련해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침독서운동을 펼치고 있다. 아침독서운동은 일본에서 먼저 시작했는데 현재 일본 전체 초중고등학교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18,000여 학교에서 매일 아침 진행되고 있고 상당한 성과를 거두고 있다.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이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일본의 아침독서운동 사례집을 번역(『아침독서 10분이 기적을 만든다』, 청어람미디어)하고 「아침독서신문」도 발간해서 관심있는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있다.

 

과다한 학습량, 휴대폰, 인터넷, TV와 게임에 둘러쌓여 있는 아이들에게 최소한 하루에 10분이라도 차분하게 책을 접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 아침독서운동이 호소하는 내용이다. 하루에 겨우 10분 동안 얼마나 책을 읽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다. 아침독서운동은 하루에 10분만 책을 읽자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최소한 10분 이상은 책을 읽자는 사회적 제안이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소박하게 시작한 독서운동이었는데 의외로 많은 관심을 받고 있고 일부 학교에서는 실제로 아침독서를 시작하기도 해 큰 보람을 느끼고 있다. 아침독서운동의 4원칙은 “모두가 한다, 매일 한다, 좋아하는 책을 읽는다, 단지 읽기만 한다”인데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다. 가정에서도 가정독서시간을 가져도 좋다.

 

요즘 아이들이 책을 읽지 않아 문제라는 우려의 목소리들이 많다. 그렇지만 이러한 우려를 하기 전에 우리 아이들을 둘러싼 독서환경이 제대로 정비되어 있는지를 먼저 살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은 원래 책을 좋아한다. 이는 7년간 어린이도서관을 운영하면서 느낀 확신이다. 단지 편하게 책을 읽을 환경이 마련되지 않기 때문에 책과 멀어지는 것이다.

 

아이들을 둘러싼 독서환경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책 문제는 일단 해결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히려 이렇게 많이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언제 다 보나 하고 행복한 걱정을 할 정도로 수준도 높고 주제도 다양하게 어린이책들이 출간되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항상 이렇게 좋은 책들이 아이들과 만나기 힘들다는 점에 있다.

기본적인 인프라인 도서관은 아직도 많이 부족하다. 공공도서관은 앞으로도 많이 확충되어야 한다. 특히 아이들이 걸어서 이용할 수 있는 작은 규모의 도서관을 많이 만드는 방향으로 정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학교도서관도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모든 학교에 도서관이 세워지고 전담사서가 배치될 때까지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없다.

 

아이들을 둘러싼 독서환경에서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주목받지 못하는 것이 학급문고이다. 학부모총회가 있다고 해서 가본 교실에는 정말 한숨만 푹푹 나오는 책들이 학급문고라고 있었다. 이 책들을 보면 마치 어린이 책이 70~80년대쯤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절로 든다. 아이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교실에 좋은 책들이 있으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책을 보게 된다. 큰 맘 먹고 가야 하는 도서관에 많은 책이 있는 것도 필요하지만 시간 날 때마다 언제든지 만만하게 꺼내볼 수 있는 교실에 좋은 책들이 있으면 보다 쉽게 책과 친해질 수 있다. 현실적으로 학교 예산으로 학급문고를 제대로 채우기는 쉽지 않으므로 학부모들이 아이들 교실에 좋은 책들을 많이 보냈으면 좋겠다. 제발 교실에 햄버거 사서 보내지 말고 책을 보내주시길….

 

아이들을 학원에 보내느라 차분하게 책 읽을 시간이나 도서관에 갈 시간을 빼앗아버린 부모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책을 많이 읽는 아이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은 많은 선생님들이 얘기하고 있고 연구 결과로도 발표되는 사실이다. 다양한 책 읽기는 아이에게 탄탄한 기초 체력을 길러주어 부모들이 그토록 원하는 공부 잘하는 아이로 저절로 만들어준다. 정말로 자녀가 공부를 잘하기를 소망하는 부모라면 사교육에 들이는 비용을 모두 책을 사주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좋은 책을 많이 읽는 것이 공부를 잘하는 최고의 지름길임을 명심하시기를….

 

물론 나는 책 읽기를 공부 잘하는 아이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책 읽기는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 하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요즘 나오는 책들이나 분위기를 보면 책 읽기를 온통 학습능력과 연결시키고 있어 심히 걱정이다.

좋은 책을 통해 느끼는 감동과 즐거움을 아이들이 직접 느꼈으면 좋겠다. 책을 보면서 삶을 풍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어졌으면 한다. 그리하여 그 아이의 삶에서 책이 항상 친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우리 아이들의 손에 휴대폰이 아닌 책이 들려있는 세상을 함께 꿈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