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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가정 2002년 3월호 칼럼] 학급문고가 참 중요해요

해피리딩 2009. 8. 14. 20:44

[새가정 2002년 3월호 칼럼]

 

학급문고가 참 중요해요

 

한상수

 

결혼한 지 10년만에 모처럼 큰맘을 먹고 일본으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난생 처음 비행기를 타보고 다른 나라 구경을 한 아이는 모든 것을 신기해 했다. 무엇보다 온가족이 며칠동안이지만 24시간을 온전하게 함께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참 좋았다. 올해 열 살이 된 아이에게는 좋은 추억이 되었으리라.

굳이 일본을 여행지로 택한 것은 일본의 어린이 독서 환경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여행 일정중에서 하루는 도서관들을 돌아보았다. 일본 정부에서 세계의 모든 어린이책들을 모아놓겠다고 마음먹고 추진하고 있는 ‘국제어린이도서관’, 몇 개의 사립문고들이 힘을 합해서 독자적인 건물을 짓고 일본의 어린이 독서 운동을 이끌고 있는 ‘도쿄어린이도서관’, 그리고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구립도서관’을 살펴보고 왔다.

 

국립 어린이 전문 도서관

일본 최초의 국립 어린이 전문도서관인 국제어린이도서관은 5월 5일 전면개관을 앞두고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대지 면적은 2,900평에 총건평은 3,000평에 달하며 40만권의 도서를 수납할 수 있는 규모이다. “어린이책은 세계를 이어주고, 미래를 개척한다!”라는 신념을 기초로 어린이의 독서환경과 정보제공환경의 정비를 위해 현재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누구보다 연구자들에게 꿈같은 공간이다. 전세계에서 나오고 있는 다양한 어린이책들을 국가에서 구입해주고 자유롭게 보게 한다는 점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국가가 국민의 세금을 어떤 곳에 사용해야하는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우리의 현실과 비교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전직대통령의 기념관에는 수백억원을 지원하는 정부가 예산이 없어서 국립어린이도서관 하나 추진하지 못하고 있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축구장 하나 지을 돈이면 도서관 몇 개를 지을 수 있을텐데…. 당분간 한국의 연구자들은 필요한 자료를 보기 위해 도쿄까지 가야만 할 것 같다.

 

개인과 사회의 아름다운 결합

도쿄어린이도서관은 가정문고에서 시작되었다. 20년 가까이 가정문고를 운영하던 4곳의 문고들이 그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보다 영속적이고 폭넓은 활동을 목표로 1974년에 설립한 도서관이다. 도서관이 설립된 지 23년이 지난 1997년에 일본 각지에서 후원금이 모아져서 도쿄 시내에 아담한 빨간벽돌 건물을 세우게 된다. 모금에 참여한 사람은 무려 3,650명에 달한다. 여기에 기금을 운영하며 사회단체를 지원하는 재단들의 후원이 더해져서 오랫동안 염원하던 자체 건물을 갖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일본의 저력이 느껴진다. 사회적으로 필요하고 의미가 있는 일에 평생동안 전념하는 사람들, 이들을 위한 개인적인 후원과 사회적 후원이 결합되어 거둔 아름다운 결실. 이처럼 미래의 희망인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접하게 하겠다는 생각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힘을 합쳐 이룬 결실은 참으로 보기 아름다웠다. 도서관 지하에 있는 자료실에는 어린이책과 관련된 참고도서 12,000권이 빽빽하게 꽂혀있다. 우리나라의 어떤 국공립도서관도 가지고 있지 못한 수준의 자료들이 조그만 사립도서관에 있다는 것이 못내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였다.

 

우체통처럼 많은 도서관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한 평범한 구립도서관이었다. 주택가 한가운데 자리잡은 도서관은 규모가 아주 아담했다. 50여평 정도 되는 규모의 도서관에는 자원봉사하는 동네 할머니와 꼬마들이 즐겁게 책과 만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사립문고 운동의 영향을 받아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정한 단위의 지역마다 구립도서관을 많이 설립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동네에 걸어서 다닐만한 구립도서관이 있어 도서관 이용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또한 가정문고를 비롯한 사립문고도 3천여개에 달한다. 현재 우리나라의 어린이도서관 수가 100여개를 밑돈다는 것과 비교하면 그 격차가 실로 엄청나다. 막상 숫자로 비교하니 우리 아이들과 어른들이 너무 안쓰럽다. 정말로 우리 사회 곳곳에 우체통처럼 도서관이 많아져야만 한다. 앞으로 그런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학부모가 만드는 멋진 학급문고

이처럼 우리의 현실은 아쉬운 점이 많이 있다. 그렇지만 남의 나라를 부러워만 하기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먼저 시작하는 게 어떨까? 이를 위해 우선 독자들에게 학급문고를 살리는 운동에 참여하라고 권하고 싶다.

참관수업을 하러 다소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의 교실에 갔다가 마음이 많이 상했다. 시중에 나와 있는 그 좋은 책들은 다 어디로 가고, 낡고 조잡한 책들이 주인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책들과 함께 우리 아이들이 1년간 교실에서 보냈다고 생각하니 속상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도대체 우리 어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우리 어른들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였어도 이렇게까지는 안됐을텐데…. 아마도 우리 학부모들이 사교육에 쏟고 있는 관심의 극히 일부라도 쏟았다면 학급문고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이처럼 겨레의 희망이라 할 수 있는 우리 아이들이 집 다음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인 교실에 좋은 책이 거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아이들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기 전에 좋은 책이 있는 독서 환경을 만들어주어야만 한다. 이제 신나고 멋진 학급문고를 만들어주는 것은 우리 어른들의 몫이 되었다.

필자가 활동하고 있는 ‘책과어린이문화’라는 어린이 문화운동 단체에서는 ‘2002년 학급문고 살리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이는 아이들이 1년동안 가까이 두고 읽을 좋은 책을 보내주어 교실 하나하나를 멋진 도서관으로 만들자는 취지이다. 참여하는 방식은 학부모들이 자기 아이들의 학급에 책을 보내주도록 후원금(5만원 단위)을 내면 책과어린이문화에서 책을 포장하여 담임선생님께 보내주는 방식이다. 보낸 책은 학년이 끝나면 돌려받게 된다.

이를 위해 관심있는 학부모들이 모여 내 아이에게 읽히고 싶은 정말 좋은 책들만 가려 뽑았다. 학급문고에 이런 좋은 책이 많이 있게 되면 그 교실은 아이들에게 감동이 넘치고 상상력이 넘치는 멋진 교실이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되면 선생님들의 재량하에 학급에서 수업전에 정기적으로 책 읽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매일 좋은 책을 친구들과 함께 읽으며 보낸 아이들은 좋은 독서 습관이 생겨 앞으로도 계속 책보기를 즐겨할 것이다.

여기에 함께 참여하거나 도서목록이 실린 신문을 받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아래 연락처로 연락하면 된다. 학급문고 도서목록은 새가정 홈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 우리의 조그만 실천이 많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초석이 될 것을 믿으며 글을 마친다.